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훈련도감의 설치
    Note 2019. 7. 27. 10:53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1가 58-1 (구세군회관 우측)

    류성룡은 1593년 6월,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정예한 군졸을 뽑아 훈련시키고 절강 지역의 무기를 모방하여 화포와 여러 무기를 제조하여 전투에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그 무렵 조선의 건장한 군사 70여 명을 선발하여 명군의 남병 장수인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 화포, 낭선, 창검 등의 전투기술과 진법을 배우도록 했다.

     

    류성룡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훈련도감 설치의 주요 계기가 됐다. 선조는 그해 8월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훈련도감의 설치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때 훈련도감이 곧바로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훈련도감이 공식적으로 조직된 것은 그해 10월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직후였다.

     

    류성룡을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로 임명하고 무반 재신(宰臣)인 조경을 훈련대장으로, 병조판서 이덕형을 유사당상(有司堂上)으로, 문신인 신경진과 이홍주를 실무자로 삼아 조직을 갖췄다.

     

    군사 확보를 위해 한성에 거주하는 굶주린 백성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했는데, 이들에게는 하루 2승(升)의 급료를 지급했다. 최초 모집한 훈련도감 군사 수는 약 500명 정도로, 최초에는 이들을 두 개의 영(營)으로 나누어 편성하고, 이일과 조경이 맡아 이들을 훈련시켰다.

     

    창설 당시 포수를 중심으로 좌영과 우영의 2영 체제로 편성됐던 훈련도감은 곧 근접전 전문 군사인 살수가 합류하면서 절강병법에 입각한 새로운 군영으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594년 초에는 세자인 광해군의 호위군대인 의용대가 훈련도감의 살수로 편입됐다. 의용대는 1593년 1월 광해군을 호위하기 위해 대장 1인이 각각 사수 2명, 창군 3명을 거느린 총 40대, 240명 규모로 편성된 부대였다.

     

    1594년 4월 이전의 훈련도감의 편제와 지휘체계는 포수 2개 초(哨), 살수 4개 초로 구성된 2개의 사(司)를 기준으로 구성됐는데, 4월에 포수 3개 초가 추가되어 훈련에 참여했다.

     

    <기효신서>에 의하면 군사 편제는 군사 10명과 지휘관인 대장 1명, 취사병인 화병 1명 등 모두 12명으로 구성된 대(隊)가 기본 단위였다. 3개의 대가 한 기(旗)를 이루고, 1명의 기총(旗摠)이 지휘했다. 3개의 기가 한 초(哨)를 구성하고 초관 1명이 지휘했는데, 여기에 약간의 기수와 고수가 함께 편성돼 휘하 군사에게 명령을 전달했다. 한 초는 약 120명 정도로 오늘날 중대에 가까운 규모였다. 5개의 초가 모여 파총(把摠)이 지휘하는 사를 이루고, 5개의 사가 모여 영장(營將)이 지휘하는 영을 구성했다.

     

    창설 초기 500명 정도의 소규모 군영에서 출발한 훈련도감은 의용대의 합류와 포수의 지속적인 확대 등으로 1594년 4월 무렵에는 모두 9개 초, 1,000여 명의 군병을 가진 상당한 규모의 군영으로 확대됐다. 포수와 살수에 이어 그해 6월에는 활을 다루는 궁수인 이른바 사수가 훈련도감에 편입됐다. 그해 11월이 되면 훈련도감은 포수 7초, 살수 4초, 사수 2초 등 모두 13초로 이전의 9초에 비해 군병 확대를 이룬다.

© plisil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