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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의 규모 및 구성Note 2019. 7. 27. 11:01
1594년 당시 1,000여 명으로 편성된 훈련도감의 규모는 한동안 변하지 않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절강병법에 따라 조선군을 편성, 훈련시키기 위한 시범적 형태의 임시 군영으로 설립됐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중 훈련도감의 군사들은 지방의 군사들을 에 따라 편성하고 훈련시키기 위해 남쪽 지방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훈련도감 군사들의 지방 파견은 도성인 한성을 방어하는 군사가 부족한 상태에서 적지 않은 문제가 되었다. 특히 1597년 말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의 선발대가 경기도 남쪽까지 진격하자 한성의 방어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훈련도감의 병력 증가와 한성 방어의 핵심 군영으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다. 그 이전인 1595년 6월, 훈련도감의 규모가 커지자 한강 서안의 방어를 위한 새로운 군영으로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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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감의 설치Note 2019. 7. 27. 10:53
류성룡은 1593년 6월,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정예한 군졸을 뽑아 훈련시키고 절강 지역의 무기를 모방하여 화포와 여러 무기를 제조하여 전투에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그 무렵 조선의 건장한 군사 70여 명을 선발하여 명군의 남병 장수인 낙상지(駱尙志)에게 보내 화포, 낭선, 창검 등의 전투기술과 진법을 배우도록 했다. 류성룡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은 훈련도감 설치의 주요 계기가 됐다. 선조는 그해 8월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훈련도감의 설치를 지시했다. 하지만 이때 훈련도감이 곧바로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훈련도감이 공식적으로 조직된 것은 그해 10월 선조가 한성으로 환도한 직후였다. 류성룡을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로 임명하고 무반 재신(宰臣)인 조경을 훈련대장으로, 병조판서 이덕형을 유사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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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효신서>를 통한 명나라 전술의 모방Note 2019. 7. 27. 10:19
1592년 4월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은 일본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군이 일본군에 비해 용맹하지 못하였거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농민 등 일반 백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 이전까지 조선군은 기병이 말 위에서 활을 쏘고 일제히 돌격하는 전술을 주로 삼았는데, 이는 기병이 부족하고 활의 사정거리가 짧았던 일본군에 비해 상당히 우월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엽 일본이 포르투갈 사람을 통해 우수한 화승총인 조총을 도입하면서 양국의 군사 능력에 변화가 초래된다. 일본이 조총에 장검 등 기존의 근접전 중심 능력을 결합한 전술체계를 보유함에 따라 조선의 군사적 우위는 사라졌다.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은 월형(月形) 진형을 치고서 먼저 기병의 장기인 기동력을 앞세워 일본군의..